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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한 친구를 만나고 온건데도 자리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 오롯이 혼자가 되면 긴장했던 것 처럼 기운이 쏙 빠지고 몸이 축 처집니다. 그리고 집에 가는 내내 누군가 살짝 빈정상한 표정이었던 게 계속 생각나고, 별것 아닌 말 한 마디가 다른 의미를 담고 있었던건 아닌지 다음날이 되어서도 반추하게 됩니다. 저는 오랫동안 그게 제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 탓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HSP라는 개념을 접하고 나서 그동안의 내 행동이 조금 이해가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HSP란 Highly Sensitive Person의 약자로, 외부 자극을 일반인보다 훨씬 빠르고 깊게 처리하는 신경학적 기질을 가진 사람을 뜻합니다. 오늘은 제가 직접 23문항 자가진단을 해보면서 알게 된 것들을 솔직하게 풀어보겠습니다.

HSP 자가진단, 23문항
심리학자 엘레인 아론(Elaine Aron)이 처음 개발한 HSP 자가진단 문항은 총 23개입니다. 13개 이상 해당되면 고기능 감각 기질일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안일한 마음으로 체크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하나씩 읽다 보니 자꾸 체크항목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바쁜 날에는 어두운 방에 혼자 틀어박혀야 한다", "배가 많이 고프면 집중력이 떨어지고 기분이 나빠진다", "경쟁 상황에서 누군가 지켜보면 평소보다 훨씬 못한다" 등등 거의 제 일상이 담겨있었습니다.
항목들을 보면,단순히 예민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려는게 아니라, 어떤 자극에 특히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짚어줍니다. 저 같은 경우는 청각과 후각, 빛 , 냄새 , 감정자극 거의 대부분의 문항에 해당됐지만, 제 지인은 작은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과 달리 빛이나 후각 자극에는 크게 개의치 않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HSP 자가진단은 23문항 중 13개 이상이면 고감각 기질 가능성이 있으나, 점수보다 어떤 자극에 반응하는지 패턴을 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 검사를 직접 해보고 싶다면 (출처: HSP Person 공식 사이트)에서 원본 문항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6번 항목: 주변의 미세한 것들을 감지하거나, 타인 감정에 영향을 받거나, 통증·카페인·빛·소음 민감여부
7~12번 항목: 풍부한 내면 세계, 예술적 감동, 양심성, 쉽게 놀라는 반응, 다중 업무 시 혼란 등
13~23번 항목: 타인 배려, 실수 회피 노력, 폭력 장면 기피, 긴장 반응, 공복 시 기분 변화, 관찰 시 성과 저하 등
나의 과민감정 경험
HSP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개념이 바로 과민감정(hyper-emotion)입니다. 과민감정이란 긍정적인 감정이든 부정적인 감정이든, 그 강도를 일반적인 수준보다 훨씬 강하고 선명하게 체감하는 특성을 말합니다.
초등학생 일 때 저는 옆동네로 전학가는 친구가 울길래 저도 모르게 따라울었던 적이 있습니다. 반 친구들 중에 그 친구 말고 우는 사람은 저 뿐이었습니다. 그 친구가 전학가는게 아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그 친구가 우니까 저도 저절로 눈물이 났습니다. 그 때의 이상했던 감각이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그 날의 감정, 교실의 온기, 친구들의 분위기가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저는 그냥 제가 기억력이 조금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게아니라 HSP의 뇌가 자극을 더 깊게 처리하기 때문에 그 날의 기억이 몸에 남아있는 거였습니다.
문제는 부정적인 감정도 같은 방식으로 처리된다는 점입니다. 타인의 고통이나 불편함을 마치 내 것처럼 느끼기 때문에, HSP는 스트레스 상황과 죄책감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이게 겉으로는 착하고 배려심 있는 성격처럼 보이지만, 사실 속으로는 불편한 감정을 회피하고자 하는 쪽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 HSP도 지나치게 양심적이고, 실수를 두려워하며, 상대방이 불편하지 않도록 과도하게 신경을 씁니다.
게다가 진짜 HSP는 타인의 감정도 강하게 느끼기 때문에,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주변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걸 먼저 의식합니다. 반면 예민한 척하면서 과민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유형은, 오로지 자기 감정에만 집중하는 것이기 때문에 HSP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HSP와 단순 예민함의 차이에 대한 심층적인 내용은 (출처: Psychology Today)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HSP가 편하게 살기 위한 환경
자가진단 항목들을 보고 나서 든 생각이 그러면 이걸 어떻게 해결하거나 극복해야하는가였습니다. HSP라는건 해결하거나 극복하거나 치료받아야 하는건 아닙니다. 다만 HSP가 좀 더 편하게 살아가기 위해 물리적 공간뿐 아니라, 주변 사람 관계를 의도적으로 조정하는게 필요합니다.
첫 번째는 수용입니다. 남들보다 자극을 훨씬 많이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걸 인정해야합니다. 왜 나만 이렇게 힘든지 자책하기보다, 뇌가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차려야합니다.
두 번째는 감정 공부입니다. HSP는 감정을 잘 느끼는 것이지 감정을 잘 아는 것은 별개입니다. 제 경험으로도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감정이 너무 강하게 몰려오면 오히려 받아들이려하기보다 회피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순간의 감정들을 처리하지 않고 억누르다 보면 결국 번아웃이 옵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는 어떤 상황에서 어떤 감정을 느꼈고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반복해서 기록하면 자기 감정 패턴을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세 번째가 환경 세팅입니다. 빛이나 소음 같은 물리적 자극을 줄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핵심은 사람입니다. 함께 있으면 한없이 배려를 쏟게 되어 내가 힘들어지는 관계를 의도적으로 줄여야 합니다. 저는 가족이 원인이라서, 나와 가족을 타자화해서 구분하고, 물리적으로 붙어있는 시간을 줄여가니, 감정적 부담도 줄어들고 일상의 피로도가 한결 달라졌습니다. 관계를 단절하는게 아니라, 에너지를 잘 나눠쓰는게 중요합니다.
자가진단 결과를 보고 많이 씁쓸했습니다. 내 인생은 앞으로도 이렇게 고되겠구나 싶었거든요. 예민함 때문에 힘든 사람은, 결국 본인 자신이니까 제일 먼저 내가 내 편이 되어야 한다는 점, 이 기질이 약점이 아니라, 제대로 알고 쓰면 강점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되새기게되었습니다. HSP라는 개념이 낯선 분들에게는 자가진단 23문항부터 한 번 해보시길 권합니다. 점수보다는, 어떤 항목에서 내가 해당되는지 파악하는게 더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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