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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렸을 때부터 '예민하다'라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 이걸 칭찬이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글자그대로 감각이 예리하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작은 것도 그냥넘어가는 법이 없다는 일종의 면박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 구도는 일상생활에서 밀접하게 관계맺는 가족안에서 더 뚜렷해졌고 저는 가족구성원에게 화가 많은 사람, 건들면 무서운 사람으로 입지가 굳어졌습니다. HSP, 즉 고도 민감성 개인이 가족 안에서 어떤 구조에 놓이는지,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왜 그런 억울한 오해가 쌓이는지에 대해 제 경험들을 바탕으로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가족 안의 감정 쓰레기통,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여기서 HSP란 Highly Sensitive Person의 약자로, 타고난 신경계의 예민함으로 인해 외부 자극을 일반인보다 훨씬 강하고 깊게 처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문제는 이 특성이 가족이라는 가장 처음만나는 사회에서 어떻게 작동하느냐입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느낀 건, 가족 안에서 감정은 반드시 어딘가로 흘러간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방향은 표현하는 사람에서 들어주는 사람 쪽으로, 강한 쪽에서 약한 쪽으로 흐릅니다. 강하게 화를 내며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는 부모와 그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며 분위기를 읽어내는 민감한 자녀 ,이런 구도에서 민감한 자녀는 구조적으로 모든 가족의 감정이 가장 마지막으로 흘러가 고이는 종착지가 되곤합니다.
민감한 자녀는 감정을 쏟아내는 부모의 표정, 말투, 분위기를 거의 즉각적으로 알아차리고 그들이 자신을 필요로하는 이유를 분석합니다. 그리고 공감이 필요한지 해결책이 필요한지 그들의 수요에 따라 반응해줍니다. 그러면 원하는 반응을 얻은 부모 입장에서는 이 아이한테는 표현해도 괜찮다는 신호로 받아들이게 되고 그렇게 감정이 민감인의 내부로 흘러들어갑니다. 쏟아집니다. 문제는 민감한 자녀가 감정을 받아주고도 또 다시 부모의 갈등상황이나 분위기가 되풀이되면 그때는 민감한 자녀는 상대를 탓하는 게 아니라 '내가 그때 감정을 잘 못 받아줬나'하고 자책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 부모는 다시 한번 부부의 문제뿐만아니라 고부갈등, 형제갈등, 동료갈등 외부의 관계까지 끌어와 자녀에게 쏟아내는게 편해지는 순환에 이르게됩니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나의 감정과 부모의 감정이 구분되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성인이 되어도, 직장을 다녀도, 엄마가 전화로 화를 내면 자신도 이유 없이 화가 나고, 형제가 불안해하면 나도 함께 불안해지는 전이상태가 이어집니다. 가족을 떠나지 못하는 게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였던 겁니다.
요약: HSP 아이는 가족 안에서 감정을 받아주는 자리에 놓이고, 자책과 감정전가 행위가 반복되며 감정 쓰레기통이 됩니다.
공감이 아니라 감정전이
고도민감인들은 대게 공감 능력이 뛰어나다고 많이들 알고 있으나 제가 경험해본 바로는 이건 공감과는 조금 다릅니다. 공감이란 내 감정은 유지하면서 상대의 입장과 감정을 함께 느껴보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런데 HSP가 실제로 경험하는 건, 상대가 짜증 나면 나도 짜증이 납니다. 상대가 슬프면 그대로 슬퍼집니다. 상대의 감정이 어떤 필터링없이 그대로 옮겨오게 되는 거죠.
여기서 감정 전이란 상대방의 감정 상태가 마치 자신의 감정 상태인것마냥 그대로 옮겨오는 현상을 말합니다. 감수성이 풍부하다는 수준이 아니라 거의 감정복사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HSP분들이 슬프거나 크게 분노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기가 어려운 이유가 극중인물의 감정에 그대로 잠식당하는 경험을 하기 때문입니다.
쉽게설명하면 공감이나 감정이입은 내가 중심에 있고 상대를 향해 이동하는 과정이지만, 감정 전이는 나를 잊고 상대 감정으로 나를 채우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이 쌓이게 되면 나 자신의 감정과 욕구로부터 단절되는 상태로 이어지기 때문에 특히 고도민감인들에게 위험한 부분입니다. 감정 전이가 반복되면 의사 결정에서도 혼란이 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인지, 부모가 원하는 것인지, 상대가 바라는 것인지 구분이 흐려지기 시작하거든요. 저는 마치 육신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유체이탈을 경험하는 것처럼 집을 찾아 허공을 떠도는 느낌이라고 생각합니다. 늘 어딘가 발 붙일데없이 불안하게 떠돌며 살아가는 것, 이게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감정의 경계가 무너진 것에서 시작된다는겁니다.
요약: HSP의 핵심은 공감이 아니라 감정 전이이며, 이 차이가 자기 감정 단절과 의사결정 혼란으로 이어집니다.
자극과부하가 만드는 가장 큰 오해
낯선 사람들이거나 아는 사람들이거나 관계없이 일정 규모 이상의 모임에서 유독 말이 없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게 바로 저 같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많아지면 표정이 굳고, 웃음이 줄고, 리액션이 뚝딱거리는게 제가 생각해도 어색함을 온몸으로 표현한다고밖에 설명이 안됩니다. 그러다보면 주변사람들에게 불만이 있는게 아니냐는 오해를 사기 십상입니다.
자극과부하란 외부에서 들어오는 감각 정보가 처리 가능한 용량을 초과하면서 뇌에 과부하가 걸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고도민감인의 주변에 사람이 많아지면 공기의 흐름, 분위기, 누군가의 말투와 비언어적표헌 등 HSP에게 동시에 들어오는 정보의 양이 급격히 늘어납니다. 이걸 동시에 처리하다 보면 뇌가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리액션을 도출하는데 오류가 발생합니다. 그 결과 말수가 줄고, 미소짓는 근육이 긴장되고, 어렵게 꺼낸 대답이 분위기에 맞지않아 어색한 공기가 흐르도록 만들기까지 합니다. 다른사람들이 보기엔 차갑거나 불만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다보니 고도민감인은 억울하게 오해를 달고다니게됩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현실적인 방법은 자신의 상태를 짧게 알려주는 겁니다. "잠깐 생각 좀 해봐도될까요" 같은 말 한마디로 적당한 반응을 도출할만한 시간을 벎으로써 상대방의 오해를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요약: 자극과부하로 인한 반응감소는 차가운 사람이라는 오해를 부르기때문에 나의 상태를 알리거나 반응을 지연할수있는 대화습관을 기르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예민하다"는 말은 칭찬이 아닙니다. 고도민감인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이 부정적 메시지를 어릴 때부터 반복적으로 받는다는 겁니다. 당사자가 아니면 느끼기 힘든 이중 신호, 예를 들면 아빠가 나를 겉으로는 좋아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나를 별로 안 좋아한다는 것까지 느껴집니다. 그 감지가 맞는데도, 부모한테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는 면박만 돌아옵니다. 이런 결과물이 쌓이면 자신의 예민한 감각과 감정이 나쁜 것, 고쳐야 할 것으로 인식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그 감각들을 부정하기 시작합니다. 느끼지 않으려 하거나, 느껴도 무시하거나, 표현하지 않게 되는 거죠. 그 결과, 안정감없이 한평생을 떠도는 외로움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이런 예민한 감각이 미적인 섬세함, 분위기의 미묘한 변화를 남들보다 더 잘 알아차리기때문에 예술적 기질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민하다는 건 본질적으로는 결함이 아니라 하나의 특성이라는 걸 스스로 받아들이고 어떻게 이 감각을 발현하고 활용할건지 고민하는것 부터가 변화의 시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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