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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오랫동안 이게 저의 도덕성이고 강점이고 윤리의식이 높은 배려심많은 사람이가 그런줄 알고 이걸 강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상대가 말수가 적으면 "조심스러운 사람이구나"라고 판단을 내리고 그렇게 사람에 대한 정보를 읽었고, 답장이 늦으면 "바쁜데도 배려해서 답한 거겠지"라고 해석했습니다. 나쁜 사인이 느껴지는 순간에도 "원래는 착한 사람이야"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반복하며 합리화했습니다. 타인을 내기준에 맞춰 단정내리고 불편함을 표현하는 것보다 나혼자 내면으로 조용히 판단하고 수긍하는게 성숙한 태도라고 믿었거든요. 그런데 심리 상담사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제가 이때까지 살면서 옳다고 믿어온 가치들이 나 스스로를 위해 내린 합리화 였다는걸 알고 나니 여태까지의 인생이 부정당하는 느낌이라 솔직히 받아들이기는 힘들었습니다.

나쁜 신호에도 떠나지 못하는 희망 중독
상담소에 고도민감인(HSP)로 찾아오는 분들의 이야기에는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나 환경을 이야기 하면서 "가끔 충돌이 생겨서 그렇지 평소에는 잘 지내요", "처음엔 되게 괜찮은 사람이었어요" 혹은 "지금은 변했지만 원래 본성은 착해요"라는 말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저도 이 패턴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관계가 분명히 저를 소진시키고 있는데도, 제 주변을 둘러싼 그 사람들을 나쁜 사람이라고, 나한테 해로운 사람이라고 딱 잘라 말하는 것이 마치 나의 인생을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요.
희망 중독이란 관계에서 상대가 나를 힘들게 해도 "내가 더 노력하면 저 사람은 바뀔 거야"라는 기대를 놓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희망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희망이 관계를 살리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미 부정적으로 결론이 뻔한 관계에서 나를 그 자리에 묶어두고 있는 것인지를 구분하지 못할 때입니다. 나를 묶고 가두는 관계라면 희망은 사랑이나 우정이 아니라 구속 장치가 됩니다. 그리고 그 구조 안에서 상대는 저를 더 편하게 이용할 수 있게 내버려두는 꼴이 됩니다.
저는 이 이야기가 처음엔 너무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볼수록 확실히 납득되기 시작한게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맺거나 끊겼던 모든 관계가 정확히 설명되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 관계에 희망을 걸고 개선하려고 했던 것은 그 관계가 실제로 좋아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과의 결론을 내리는 것이 관계의 끝을 의미하는 것이라는걸 너무 잘 알았기때문이었습니다.
요약: 희망 중독은 감정이 아니라 고통 회피의 구조다. 희망이 나를 살리는지, 묶어두는지 구분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고통이 너무 크게 느껴지는 것, 감각 민감성과 공감 능력
희망 중독이 생기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HSP 특유의 감각 민감성입니다. 여기서 감각 민감성이란 관계의 긴장, 애매한 분위기, 거절 후 나와 상대가 상처받는 순간, 관계가 끊어지는 상실감 같은 것들을 초민감자들은 일반인보다 훨씬 강하게 체감하는 특성을 말합니다. 저 또한 누군가에게 "이 관계가 나에게 해롭다"고 스스로 결론을 내리고 이를 행동으로 옮겨야한다고 판단하는 그 자체가 두통이나 위통, 가슴두근거림, 어지럼증을 동반하는 신체화현상이 나타날 정도로 힘들고 무겁게 느껴져 오랫동안 회피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둘째는 공감 능력입니다. 상대가 자기중심적으로 굴더라도 그냥 "나쁜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성장 배경, 현재 처한 상황, 어린 시절 결핍, 신체적, 정신적 장애까지 통합적으로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읽고 판단하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됩니다. "이 상황만 벗어나면 원래 좋은 사람일 거야." "어린 시절 결핍이 많아서 그러는 거니까 내가 더 보듬어주면 나아질 거야." 제가 지금까지도 매일 수 없이 사람을 만나면 생각하고 사람에 대한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셋째는 예단행위에 대한 거부감입니다. HSP는 세상을 다층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가치로 여기기 때문에,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미리 판단하고 규정하는 것 자체가 흑백논리처럼 느껴집니다. 그게 미성숙한 태도라는 윤리의식까지 더해지면, 예단행위를 거부하는 것이 오히려 나 스스로가 성숙한 사람이라는 증거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감각 민감성: 관계 단절의 고통이 너무 크게 느껴져 결론을 미룸
공감 능력: 상대의 맥락을 다차원적으로 읽다 보니 가능성에 집중하게 됨
예단행위 거부: 단정 짓는 것 자체를 폭력이자 미성숙으로 인식함
이 세 가지가 맞물리면, 아무리 해로운 관계도 내가 조금 더 노력하면 바뀔수 있을거란 희망을 가지고 버티게 됩니다. (출처: Psychology Today - Highly Sensitive Person)
사회적 절제가 필요한 공감 구조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저는 제 공감 능력이 너무 정도를 지나치는게 아닌가라고 오해했습니다. 맹자가 말하는 측은지심이란 어린아이가 우물가에 기어가는 것을 보면 아무리 나쁜 사람도 즉각적으로 구하러 달려가는, 본능적 반응을 말합니다. 보상을 기대하거나 평판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그냥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것, 그게 성선설에 기반한 인간다움이며 가치있는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고도민감인 HSP가 상대에게서 결핍을 읽고, 그 사람의 상황을 이해하려 하고, 관계의 희망을 놓지 않는 것은 이 측은지심 그리고 인간은 선하다는 성선설과 닿아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이라면 가져야하는 사람됨이라고 생각하는 핵심가치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오랫동안 스스로를 탓했던 것이 억울하게 느껴지면서 동시에 내 탓이 아니라는 말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공자는 논어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공손하기만 하고 '예'가 없으면 본인만 수고롭고 치욕을 당한다. 신중하기만 하고 '예'가 없으면 두려움만 커진다. 용맹하기만 하고 '예'가 없으면 난폭해진다. 강직하기만 하고 '예'가 없으면 야박해진다. 저는 이 네 문장을 읽으면서 제 관계 패턴이 그대로 보였습니다. 공손하고 친밀하게 상대를 대했지만, 그것이 '예',즉 나와 상대의 경계를 긋고 사회적으로 거리를 유지하는 것으로 절제되지 않으면 나만 수고롭고 두려움과 불안만 쌓이는 상황이 반복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관계에서 '예(사회적절제)'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관계와 사람이 성숙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인데 이게 바로 역설입니다. 초민감자 HSP는 예단하고 사람 간 경계를 긋는 것을 미성숙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공자의 논리에 따르면, 오히려 '예(사회적 절제)'없이 공감과 희망만 잡고 늘어지는 것이 미성숙하다는 겁니다. 이제는 저도 사람간 경계를 인정하고, 관계를 규정하고, 때로는 단호하게 끊어낼 줄도 아는 것이 진짜 성숙한 행동이라는 것을 압니다. 공감은 계속하되, 사회적 절제를 표현하는 것. 그것이 희망 중독에서 빠져나오는 현실적이면서 바람적인 방향이었습니다.
요약: 예(사회적 절제)는 관계의 균형을 맞추는 행위이자 성숙의 통로다. 경계를 긋는 것은 오히려 성숙한 인간관계에 필요한 핵심이다.
제가 무조건적인 공감과 이해를 옳은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남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은 제 본성이었고, 그 본성은 틀리지 않았습니다만 그것이 관계 안에서 균형을 잃었을 때, 관계에 대한 희망은 나를 그 자리에 붙들어 두는 족쇄가 되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나에게 나쁜 신호를 보내는 사람을 이해하려는 충동이 먼저 올라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다음 질문을 합니다. 상대에 대한 내 기대와 희망이 나를 살리고 있는가, 아니면 묶고 가두고 있는가. 느리지만 천천히 나를 살리면서 건강한 관계를 깨달으려 노력하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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