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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제껏 살아오면서 관계를 맺는 사람들에게 잘 맞춰주는게 좋은점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상대가 뭘 원하는지, 지금 기분이 어떤지, 어떤 말을 들으면 불편해할지까지 알고 싶지 않아도 제 눈에는 그게 저절로 알아차릴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까, 저는 몇 년을 사귄 친구와의 관계에서 단 한 번도 제가먹고 싶은 음식을 먼저 말한 적이 없었고, 급기야 친구는 저에게 "너는 왜 네 이야기를 안해?" 라며 질문을 하더라고요. 저는 그게 배려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게 저를 좀먹고 있었던 나쁜 버릇이었던 겁니다. 그 질문을 받았던 그 날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납니다.

나르시시스트에게 끌리는 이유
HSP란 'Highly Sensitive Person', 즉 고도민감자를 말합니다. 자극에 대한 민감성이 유전적으로 높아 타인의 감정, 분위기, 미세한 변화를 일반인보다 훨씬 깊이 처리하는 사람들입니다. 전체 인구의 약 15~20%가 해당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출처: The Highly Sensitive Person).
HSP에게 가장 피해가 큰 영역은 결국 사람 관계입니다. 상대의 감정이나 기분이 알고 싶지 않아도 그대로 느껴지다 보니, 부탁할 때 상대가 곤란해할 것 같아서 부탁을 못 하고, 거절할 때 상대가 실망할 것 같아서 거절도 못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간의 관계에서 구조적으로 주는 쪽, 즉 기버(Giver)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기버란 관계에서 지속적으로 상대에게 주기만하고 배려하는 역할을 맡게 되는 사람을 뜻합니다.
문제는 바로 이 부분이 나르시시스트의 수요와 딱 맞아 떨어져서 강자와 약자의 구조가 형성되고 한 쪽이 희생하게되는 겁니다. 나르시시스트는 누군가를 지배하고 통제하면서 자신의 부족한 자존감을 채우려 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에게 이 고도민감자는 자신들의 자존감을 채워줄 수 있는 최고의 대상입니다. 나르시시스트는 무의식적으로 HSP를 알아보고, HSP는 테이커(taker)인 나르시시스트를 빛나게 해주고 응원해주려 합니다.
프로이트는 이 패턴을 "운명 신경증"이라고 불렀습니다. 운명신경증이란 의식적으로는 원하지 않으면서도 인생에서 같은 관계 패턴을 반복하게 만드는 무의식적 반복강박을 말합니다. 관계가 파괴적인 줄 알면서도 자꾸 같은 유형의 사람에게 끌리는 것, 이게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심리적 역동이라는 거죠.
실제로 고도민감자인 제가 겪어보고 나중에 알아차린 사실인데, 가장 위험한 대상은 내향적 나르시시스트입니다. 겉으로 보면 수줍고 의기소침해 보이기 때문에, HSP는 인류애적 감수성이 발동하여 본능적으로 도와줘야하는 대상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근데 오래 관계를 맺고 깊숙이 알면서 친하게 지내다 보니 내성적이라고 생각했던 상대가 굉장히 강한 고집을 드러내거나, 사소한 일이나 합의를 해야하는 일에도 자기 중심적인 패턴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합니다. 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챘을 때는 이미 오랜 시간 착취적인 관계가 지속된 후였고, 오히려 나르시시스트 쪽에서 고도민감자가 필요 없어져서 관계가 끝났음을 통보받았을 때 비로소 알게되었습니다.
요약: HSP는 구조적으로 기버가 되고, 나르시시스트는 무의식적으로 이를 알아아차리고 다가와서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관계가 시작된다.
고도민감자의 실제 사례 경험
제가 HSP로서 삶을 살아오면서 경험해 본것에 의하면 저의 관계 패턴에는 꽤 전형적인 흐름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상대를 잘 맞춰줍니다. 상대는 우리가 잘 맞는 비슷한 친구라고 생각하고, 제가 배려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 합니다. 애초에 제 배려는 상대가 알아주길 바라는 것도 아닐뿐더러 상대가 알아차리고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고싶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이게 몇 달, 몇 년 쌓이면 어느 날 아주 사소한 일에도 예상치 못한 참혹한 결과를 낳게됩니다. 지극히 고도민감자의 기준으로 배려랍시고 참아왔던 몇달치, 몇년치 감정이 한꺼번에 터지니까 상대 입장에서는 황당할 수밖에 없죠. 갈등이 깊어지고 나서야 상대는 본인이 원한 배려가 아니었다고 오히려 고도민감자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합니다. 대부분 그 날이 바로 관계를 종결하는 날이 됩니다.
그 때를 생각하면 나르시시스트의 반응은 고도민감자인 제가 원치않는 과도한 배려를 한게 잘못이라고 말합니다. 내 배려를 알아주고 칭찬해주기를 바란건 아니었는데, 상대는 그렇게 받아들였고 저는 그 반응에 크게 상처받고 좌절했습니다. 슬프게도, 이 감정의 갈등이 당사자와 터놓고 해결하지 않으면, 고도민감자는 그 내면에서 처리되지 않은 감정이 곪아버리게됩니다. 그렇게 되면 해결되지 않은 감정들은 내면의 우울, 불안, 강박 같은 더 크고 만성적인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이런 관계를 반복하다 보면 결국 고도민감자는 관계 자체를 회피하게 되고 인간에 대한 신뢰나 기대가 무너지게됩니다. 사람이 그리우면서도 사람이 무서운 상태, 그게 HSP가 관계에서 빠지는 가장 슬픈 결말입니다. 대인관계에서 오는 친밀감, 소속감, 안정감을 남들보다 훨씬 크게 느끼고 갈망하면서도, 그 관계 자체가 스스로 정신을 갉아먹기 때문에 누구와도 온전히 가까워질수 없습니다.
HSP인 제가 입장을 바꿔 생각해본다 해도 나의 가장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수 년간 본인의 속마음을 숨기고 상대감정만 살피느라 에너지를 다 써왔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된다면 그거대로 배신감이 들고, 미안해서 화가 날 것 같습니다. 마음을 쓴 배려가 원치 않은 상대에게는 거리감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걸 입장을 바꿔보면 이해가 됩니다.
요약: 표현하지 않고 쌓아둔 감정은 밖으로 터지면 절교, 안으로 터지면 우울불안장애. 배려를 숨기는 것은 상대에게도 친밀감이 아니라 거리감이 된다.
관계를 지키는 실전 해결방법
현실적으로 고도민감자에게 나르시시스트는 독이기에 끊어내는 것이 가장 현명하지만, 가족이나 배우자인 경우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실제로 시도해 본 방법은 그들에게 크게 마음쓰지않고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에게 특별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질만한 행동이나 대우를 하지 않고 그들의 요구에 원하는 반응이나 보상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원하는 반응이나 대우를 해주지 않으면 려 더 격렬하게 연민을 자극하고, 더 강하게 통제하려 합니다. 그 부분을 잘 인내하고 감수해야 이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HSP 본인의 감각을 믿고 따라야합니다. 어릴 때부터 '예민하다', '사소한걸로 트집잡는다' 등 가스라이팅을 많이 당했기 때문에 HSP인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에 확신이 없습니다. 하지만 HSP의 감각은 대부분 정확하기때문에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면, 평소에 조금씩이라도 자기 표현을 해야 합니다. 나의 욕구나 기분, 배려심 등을 표현하는 것이 상대에게 부담을 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속마음을 나누는 것이 깊고 진솔한 관계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
카를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말하는 페르소나와 그림자의 관점에서 보면, 타인 중심적인 페르소나가 클수록 그 이면에 자기 중심적인 그림자도 그만큼 큽니다. 그 둘 사이의 거리가 멀고 계속해서 자기 표현을 하지 않는다면 개인의 내면으로 부정적인 에너지가 방출되어 결국엔 낫기 어려운 크고 긴 병이 찾아옵니다. 가끔은 의도적으로 자기 중심적으로 행동해보는 것이 상대와 나 사이의 간극을 좁히고 평화로운 공존을 위한 성숙한 대처 방법입니다.
요약: 나르시시스트에겐 원하는 반응줄이기, 내 감각은 믿어주기, 좋은 관계엔 평소 자기 표현 — HSP에게 가장 필요한 세 가지 실천이다.
HSP로 산다는 건, 세상을 좀 더 선명하게 느끼며 사는 겁니다. 그게 장점이기도 하고, 때로는 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가 경험하면서 가장 확실하게 배운 건, 나를 갉아먹으면서 유지하는 관계는 관계가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지금 어디쯤 있는지를 가까운 사람에게 알리는 것만으로도 관계는 훨씬 오래, 건강하게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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